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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충주 시티투어를 이용하여 탄금대 봄 풍경을 담아왔습니다(2019.04.13 토)♧

반 석 2019. 5. 7. 00:00

 ♧[첫번째] 충주 시티투어를 이용하여 탄금대 봄 풍경을 담아왔습니다(2019.04.13 토)♧ 
2019년 4월 13일 대전에서 07:47분에 출발하는 충북선 무궁화 열차를 탑승한 다음 충주역에서 시티투어 버스를 탑승한 후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첫 번째 순서로 탄금대를 탐방하는 가운데 촬영한 풍경입니다. 충주는 나에게 낯설지 않은 곳이지만 탄금대는 와보았는지 처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립 장군의 탄금대 배수진 전투와 임경업 장군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감자꽃 시비(詩碑)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담아온 탄금대의 봄 풍경입니다.

◑충주 탄금대와 탄금공원은?◐
탄금대는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된 탄금대는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순국의 현장이며, 현대로 넘어와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숨져간 넋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남한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칠금동 대문산 기슭의 탄금대.조선조로 넘어와서 임진왜란을 맞아 탄금대는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치열한 격전지로 변모한다. 신립장군의 가슴아픈 패전이 이곳에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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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시티투어에서 지원나온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청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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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클릭하여 내용을 읽어보시고 감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충주 시티투어에서 지원나온 문화해설사의 충혼탑에 대한 설명을 청취하고 있습니다 (탑신은 포탄을 상징한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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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전투는?◐
탄금대 전투는 1592년 4월 14일부터 일본군이 조선침략을 감행해 부산·동래 등을 함락하며 북상했다. 이에 신립은 충청도의 군현 병력을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종사관 김여물 등을 이끌고 조령으로 진출했다. 김여물은 조선군의 수가 열세이므로 협곡을 이용한 기습작전을 권했으나 신립은 기병력을 이용할 수 있는 평지에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4월 26일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충주성 인근의 탄금대로 가서 낮은 저습지에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상주에서 승리한 고니시의 일본군대는 4월 28일 충주에 도착해 산을 따라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공격해왔다. 신립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했다. 승리한 일본군은 충주성에 들어갔으며, 이튿날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군대와 합세하여 한성방면으로 북진했다.

◑충장공 신립(申砬) 장군은?◐
충장공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충주성 밖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했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6, 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오자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 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하였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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